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숙빈 최씨 (문단 편집) === 말년 === 많은 사극들이 희빈 장씨의 일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일반 시청자들은 숙빈 최씨의 후일담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숙빈 최씨는 향년 49세로 9살이나 많은 숙종보다 2년 일찍 죽었다. 인원왕후의 왕비 책봉 후 인원왕후에 입적된 연잉군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숙빈 최씨는 인원왕후와 친밀했다. 숙빈 최씨 말년에 숙빈 최씨가 궐을 나갔을거라 추측하는 근거는 이현궁을 환수할 때 등장하는 숙빈방이라는 표현 때문인데 <[[조선왕조실록]]> 숙종 편을 보면 장숙원방, 장귀인방, 숙의방이란 표현이 등장하며 <비변사등록>에도 영빈방이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으로 보아 숙빈방이라는 표현은 숙빈 최씨가 기거하는 곳이 아닌 숙빈 최씨의 창고 또는 재물일 가능성이 높다.[* 장숙원방, 장귀인방, 영빈방이 쓰인 시기에 희빈 장씨와 영빈 김씨는 모두 궐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연잉군이 가례를 올린 후 궁을 나가야 할 절차를 의논할 때의 실록 기사(1704년 숙종30년 4월 17일)를 자세히 보면 숙종은 '연잉군이 [[결혼]]했으니 궁을 나가야 하는데 집이 없네. 다른 큰 공사 중이라 또 집 짓기가 어려운 줄은 아는데 내 아들 집 일이니 어쩔 수 없어. 해당 부서에 말해서 예산을 책정하라(연잉군의 사저를 지어라).' 하는 요지로 전교를 내렸다. 이에 대해 사관이 '숙빈께서 이현에 큰 저택(이현궁)이 있는데 왕자를 위하여 또 집을 짓고자 하니 주상께서 신하들이 말 나올까 봐 부득이 한 거라고 먼저 전교를 내리고 선수를 치니 사람들에서 남몰래 탄식한다.'라 평이나, <승정원일기>와 <비변사등록>의 1702년 이현궁의 대규모 토목 공사의 규모가 워낙 커 말 30필이 토석을 운반하는 데 석 달 이상이 걸린다며 숙종에게 만류하는 [[상소]]를 올린 것과 숙종이 결국 끝까지 밀어붙여 공사를 마친 기록을 보면 병중이나 숙종 사후에 거주할 용도의 사제로 봄이 맞는다. 영조는 숙빈 최씨가 1702년 궁 밖으로 출궁당했다는 설을 확실하게 부정하였고, 임방이 지었다는 숙빈 최씨의 제문 역시 숙빈 최씨의 1702년 '궁 밖 출궁설'을 전적으로 부정한다. 두 기록 모두 공통적으로 숙빈 최씨가 40대 말년에 궐에서 숙종을 간병했다고 하며 숙종 42년에 병환이 들어 사가로 나아가 치료하라는 숙종의 명으로 3년 동안 사가에 머물렀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47세에 세상을 떠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